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시뮬라시옹...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이론으로
실재가 실재 아닌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Simulation)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부른다.
요즘... 난 소설을 쓴다.
내가 느꼈던 세상 속에서의 소통과 교감의 고단함을
단적으로 들어내는 조금은 어두운 주제로.
그간 그리 많지는 않지만 몇년간 쌓아두었던 짧은 글...
그리고 요즘 다시 느끼는 많은 새로운 감정들을
짜집기 하듯이 이야기 속에 반영하면서.
헌데... 요 몇일 난 단 한글자도 쓸 수 가 없었다.
이 소설의 앤딩을 놓고 심각한 고민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 캐릭터에 내자신을 과하게 몰입한 나머지
처음 기획했던 비극적이고 싸이코적인 결말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기에...
작가로서 자신의 소설 속 캐릭터에 애착을가지고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처 소설의 의도를 벗어나 주제를 흐린다면
이것은 이만저만 난감한 일이 아닐수 없다.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난 처음의 내 의도와 생각대로 앤딩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회적 현실과 세상에 대한 절망을
예쁘게 포장하거나 그럴듯한 착한 연애소설로 끝맺기엔
세상이 그리 아름다운 모습만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결코 내가 바라는 세상을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면...
차라리 시뮬라크르 내지는 시뮬라시옹을 통해 만들어낸
내 안의 가상의 유토피아에서 사는 것이
어찌 보면 더 행복한 일이지 않을까..라는 위험한 상상을 해본다.
(영화 <인셉션>도 그런 의도와 취지가 잠재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경계하고자 했던,
자유의지를 상실한 메트리스 속 인간들을
위험한 상상속에서 나마 동경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도.. 이 팍팍한 시대가 만든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고...
내가 소설속에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을 그려낸 것도
이 시대를 상처없이 살아가기 위한
대안적 삶의 방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물론 결말을 원안대로 비극적으로 끝내기로 마음 먹음으로서
그것을 강하게 부인하긴 했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냥... 무심코 간과될 수 없는 문제인것 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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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이런 글을 읽었다.
"소통은 부족해도 문제이고 많아도 문제이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때 우리는 때때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버린다.
상대에 대한 애정으로 혹은 욕심으로 말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내가 하고 싶었던 모든 말이
수용자에게는 1/3만큼도 진정으로 다가가지 않음을 느낀다.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애초의 진정성은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초고를 마치고 퇴고를 할때 반드시 상기시켜야 할 말인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