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 생각

처서(處暑)에 기대어...

오하라74 2011. 8. 23. 17:00

오늘은 24절기의 14번째에 해당하는 처서이다.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는 시기다.

 

아침 저녁으로는 제법 날씨가 선선하다.

그래도 아직은 한낮엔 뜨거운 태양이 거리를 뜨겁게 달구기에

그 일교차가 매우 심하다.

 

더위가 누그러 지듯이...

내 심난했던 마음도 조금씩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아직은 한낮의 태양처럼 마음의 불덩이가

당황스럽게 쑤욱 고개를 들고 잔잔한 가슴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마치 날씨의 일교차 처럼 마음에도 일교차가 생기는 것이다.

온전히 가을을 맞이하기엔 때가 이른가 보다.

 

네이버에 코스모스가 한드러지게 피어있는 사진이 올라왔다.

아직 가을이 되려면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 눈치없고 철없는 코스모스들 같으니라고.

다음번 절기인 백로쯤에는 완연한 가을이 찾아올까...

 

딱 10년 전인 것 같다.

두해 모자란 서른에 즈음하여 시집을 냈으니...

무엇이 그리 슬프고 힘들었는지...

사랑했던 사람을 가슴에 묻고 시들을 썼었다.

이제 그의 나이도 40살이 되었을 것이다.

후후... 중년의 아저씨... 그는 나를 기억이나 할런지...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굳이 그 시집을 들추지 않아도 여전히 솜솜히 떠오른다.

가을 춘천 기차여행 그리고 춘천호반 잔디밭에서

무릎베게를 하고 푸른하늘을 바라보던 기억...

신림동부터 양재동까지 무려 6시간 가까이

새벽을 같이 걸었던 기억...

처음 내 손을 잡았을때의 그의 수줍은 미소며...

그의 가는 머리결...새치를 보고 늙었다고 놀렸던 기억...

딸기향이 났었다던 그의 고등학교시절 첫사랑의 이야기...

추운겨울 내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물을 보였던

그의 붉어진 얼굴까지...

 

"나에게 이런 추억을 만들어주면 어떻게...

 앞으로 난 어쩌라고..."

 

원망하 듯 눈길을 발로 툭 차면서 내 뱉었던...

그의 눈물과 함께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다.

키스 한번 해보지 못하고..그저 함께 손을 잡는 것 만으로도

가슴 벅찼던 순수하고 풋풋했던 사랑...

그 순수함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시집까지 냈으니...

참 많이 사랑했었고 또 아파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 이후 난 그의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 필리핀지사로 자원했단 소식외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헤어졌기때문에 이렇게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사랑이 이루어지고 지금 함께 살고 있다면...

웬수가 되어 매일 싸우고 있을지도 모를일이고...

그냥 멋진 10년전 그 모습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나을수도..

 

이렇게 과거 기억들을 꺼내다 보니...

내 고2시절의 첫사랑도 기억이 나고...후후...

동갑이었던...덩치도 좋고 키가 183이나 되어

함께 있으면 내가 한없이 작아보였던...

정말 순진하고 수줍음이 많았던 그...

고등학교 시절의 그의 얼굴만 내 기억에 존재하기에...

그의 모습은 여전히 18살이고 더이상 늙지 않는다.

아놔... 이런식으로 기억들을 다 꺼내다간...끝이 없겠다.

갑자기 대학교때 2년동안 CC 였던 그녀석도 떠오르고...

베이스 기타를 치던 손이 정말 예뻣던...

그리고 보니 그녀석도 참 수줍음 많고 말이 없었는데...

 

이별을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도 많이 했다는 것이고...

내 기억속에 그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빼곡히 쌓여

꺼내 볼 추억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것...

다행이도 이별이라는 아픈 기억보다는

함께 있어 행복했던 기억만 떠오르는 걸 보면...

난 참 아름다운 사랑들을 했었나 보다.

물론 개중에는 몇몇 씁쓸했던 기억도 남아있긴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때의 순수함을 찾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거울 속엔 그 시절의 내가 아닌 다른이가 서있다.

눈가엔 살짝 주름도 보이고... 세월의 연륜도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었다.

내 기억 속 그들은 아직도 풋풋하고 티없이 맑은 청춘인데...

 

 

아... 알 수 없는 애잔함의 그리움이 가득히 밀려오는 오후다...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