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에 있어 과잉 생산된 에너지는
인간에게 비만이라는 부작용을 가지고 오고...
인류에 있어 과잉 생산된 제화와 용역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부작용을 가져온다.
늘 생각이 많고 에너지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난...
내 안의 불덩이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해 내야하고..
때문에 생각이 넘칠땐 글로서... 그림으로서... 그것을 표출하고...
이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외적 에너지는 춤이나 여행으로 그것을 표출한다.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탱고는 과잉된 에너지의 외적 발산이자 나눔 같은 것이다.^^*)
가끔 우리는 헌혈이라는 활동을 통해
기존에 만들어진 혈액을 밖으로 뽑아내고 새로운 피를 생산해 낸다.
마찬가지로... 내안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밖으로 뽑아 내야만
항상 새로운 기운과 에너지를 내 안에 새롭게 들일 수 있는 것.
때때로... 깜량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 과잉으로 축제된 경제적 부가...
그 사람을 유흥과 쾌락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더 나아가 인간성 파괴와 폭력적 성격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에 불유쾌한 파멸..즉 자신에게 존재하는 과잉된 것을 버리되...
그 방법이 잘 못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 이 과잉된 것들이 제대로된 인성을 가진 인간에게 주어졌다면
나눔이나 기부 같은 유쾌한 내려놓음으로 그 균형을 잘 유지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의 순환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어떤 형태로든 무엇인가를 죽이며 살아간다.
죽인다는 말 자체가 조금은 강한 뉘앙스로 다가올 수는 있겠지만
아주 쉬운 예로... 우리가 살아숨쉬기 위해 섭취하는 많은 음식들 또한
생물의 희생...즉 죽은 그들을 내 안에 들이고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않는가.
일전에 "먹는다"는 말의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하면서
"타나토스"란 죽음에 이르는 극적 카타르시스에 대해 잠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파멸 즉... 내 안에 것을 밖으로 버리는 행위를
내것을 죽인다란 의미로 포괄적으로 해석했을 때
이 극적 카타르시스를 어렴풋이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스스로를 해하거나 타인을 해하는 폭력적 성향의 불유쾌한 파멸이든...
남을 돕고 나눔을 실천하는 유쾌한 파멸이든...
이런 파멸을 통해 사람들은 희열을 느끼고 극적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는가..
이렇게 볼때 죽음에 이르는 타나토스도 파멸이란 맹락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과잉된 에너지의 파멸이 자신 스스로에게까지 영향을 미칠때
이 타나토스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난 내 안에서 생산되 스스로 용해되지 않은 과잉된 에너지를 분출함에 있어
일차적으로는 내 자신을 위한 파멸.. 즉 생각의 내려놓음을 실천함으로해서
그것이 인성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보다 가치있는 것으로 승화되길 바라며
춤을 통해서도 나의 에너지의 유쾌한 파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기(氣)와 에너지를 공유하고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나의 유쾌한 파멸이 좀 더 성숙되고 다듬어 진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대중적인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며
나와의 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삶의 행복과 즐거움은 물론
지친 일상에 설렘과 떨림을 경험할 수 있는 힐링이 될 것이란 희망을 가져본다.
삶의 힐링.... 즉 나의 과잉된 에너지의 유쾌한 파멸이...
누군가에게 삶의 치유가 되고 나아가 희망이 된다면
난 기꺼이 내 것을 내려놓는 유쾌한 파멸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로...
이렇게 내것을 내려놓고 파멸시킴으로서
또 다시 그 빈자리에 쌓이게 되는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기운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더욱 건강해 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권력의 치명적인 유혹에...
권력자들이 가진 과잉된 에너지가 부디 불유쾌한 파멸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나 역시도... 포이어바흐의 관념론으로서의 관조적 유물론에 머물지 않고...
마르크스의 새로운 유물론에 가까운...
보다 능동적인 가치창조에 내 에너지들이 유기적으로 사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PS. 노파심에 부처...
얼마남지 않은 선거에 있어서도...
비록 우리가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가 실천 될 수 는 없겠지만...
되도록 대중의 뜻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대표를 잘 선택했으면 한다.
직접민주주의든.. 대리민주주의든...
우리의 삶의 질적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제대로된 대리인들을 뽑았으면 하는 바램...
민주주의의 원론으로 돌아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의 길을...
되도록 적은 희생으로 열어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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